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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아산(峨山) 정주영의 한 마디

2024.03.19 3min 33sec

새로운 시작을 시작하는 아산 정주영의 한마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어


우리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사회초년생이라면 더욱 많은 불안과 걱정, 혼란을 경험하게 되죠.

정주영 선대회장에게도 이러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막노동자 합숙소에서 빈대에 온 몸이 뜯기고, 쌀 배달꾼으로 취직해 부족한 실력으로 자전거를 타다 고꾸라진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난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삶 자체가 도전의 연속이었던 정주영 선대회장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음 한 발을 내딛는 용기,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창조성, 오늘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개척하는 추진력으로 대한민국 경제의 큰 별이 되었습니다. 불안과 어려움이 가득한 상황 속에서도 호기롭게 극복해냈던 정주영 선대회장의 어록을 소개합니다.


반드시 된다는 자신감을 가져 신차발표회장에서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든 "반드시 된다"는 확신 90%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로 100%를 채우지, 안 될 수도 있다는 회의나 불안은 단 1%도 끼워 넣지 않는다"


정주영 선대회장의 도전정신은 “이봐, 해봤어?”라는 말로 압축됩니다. 자동차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을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국으로 만든 것도, 국토 확장의 꿈을 키우며 간척사업을 성공해낸 것도 모두 이 한 마디에서 비롯됐죠. 특유의 추진력 덕분에 ‘불도저’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무턱대고 일을 진척시키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많은 일이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으로 비쳤을 뿐입니다. 

정주영 선대회장은 “반드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고정관념을 깨는 기발한 발상으로 언제나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1977년 무렵, 선대회장은 “땅은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라며 많은 반대에도 서산 간척사업을 계획했습니다.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드는 과정 중 최고난도는 자동차만 한 바위도 순간 쓸어버리는 초속 8m의 강한 유속을 마주할 때였는데요. 답이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기필코 답을 찾아냈던 선대회장은 ‘정주영 공법’을 탄생시켰습니다. 폐유조선을 이용한 전무후무한 발상 덕에 방조제 공사에 필수인 물막이에 성공한 우리나라는 전체 국토의 1%에 해당하는 약 1만6000ha의 토지를 더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모함하지 않으면 늘 제자리야 금강산 구룡연에서

"모험이 없으면 큰 발전도 없다. 세상일에는 공짜로 얻어지는 성과란 절대로 없다. 보다 큰 발전을 희망한 모험에는 또 그만큼의 대가도 치러야 한다"


현대건설이 국내 건설사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것도 기존 프레임을 넘어서는 정주영 선대회장의 도전 정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모험 없이는 큰 발전도 없다”는 철학 아래, 1965년 선진 16개국 29개 업체와 경쟁하여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한 것이죠. 국내에 고속도로 하나 없던 상황에서 이룬 성과였기에 대단한 화제를 모았고, 당시 태국으로 첫 출국하는 기술진과 노무자들의 모습을 KBS가 생중계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은 단순히 한 기업의 해외 진출을 넘어, 대한민국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힌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시련이 있을 뿐 실패는 없어 서산 간척사업 현장에서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있고 건강한 한 나에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상황에서 정주영 선대회장은 대구와 거창을 잇는 고령교 복구공사를 수주했습니다. 공사는 시작부터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기초만 남은 채 거의 파괴된 상태인 데다 가늠하기 어려운 낙동강의 수심,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자재비와 인건비 등이 치솟은 탓에 공사 중단의 위기도 여러 번 겪어야 했죠. 포기하지 않고 공사를 마무리 지었지만 남는 것은 20년이나 갚아야 할 정도의 큰 빚이었습니다. 고령교 복구공사는 분명 실패한 프로젝트였지만, 현대건설은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공사를 마무리했던 점을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그 덕에 가창댐 확장 공사, 부산항 제4부두 신축공사 등을 잇달아 수주하며 회사를 조금씩 일으켜 세웠고,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시련은 있어도 완전한 실패란 없다”라는 신념을 실현해냈습니다.


신용을 잃으면 그걸로 끝이야 주베일 산업항 건설 현장에서

"신용은 나무처럼 자라는 것이다. 또한 신용이란 명예스러운 것이다. 사업은 망해도 괜찮지만 신용을 잃으면 그걸로 끝이다"


성실과 신용은 선대회장의 좌우명이자 경영의 최우선 가치였습니다. 막대한 빚을 졌음에도 고령교 공사를 포기하지 않은 것도 신용을 목숨처럼 여겼기 때문이었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는 공기를 맞추기 위해 일반 시멘트보다 3배 비싼 조강 시멘트를 사용했습니다. 어차피 수판을 엎어놓고 시작한 일이었기에 이익을 남길 수 없다면 공기라도 맞춰야 한다는 판단에서였죠. 늘 “이익이냐, 신용이냐 중에서 선택하라면 나는 언제나 신용이다”고 말해온 선대회장이었습니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라면 손해도 감수했던 선대회장은 스스로 “건설인”이라 소개했습니다. 각종 산업시설과 기반시설, 국가 간접시설을 건설하는 일은 선이 굵으면서도 정밀해야 했고, 선대회장에게 꼭 맞는 옷과 같았습니다.


참신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럼 늘 반대를 떠올려봐 집무실에서

"고정관념의 노예가 되어 있으면 순간순간의 적응력이 우둔해질 수밖에 없다. 교과서적인 사고 방식이 곧 고정관념이며 그것이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함정이다"


정주영 선대회장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혁신의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하고자 하는 굳센 의지’를 가졌을 때 발휘되는 무한한 잠재 능력과 창의성은 선대회장이 가진 추진력의 근간이었죠. 남들은 5년 걸릴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2년 3개월 만에 해낸 것도 ‘조선소를 지어놓고 난 뒤 선박 건조를 한다’라는 상식을 뒤엎은 결과물이었습니다. 

20세기 최대 역사(役事)인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건설 공사 때에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복잡한 공정을 수행하던 것을 단박에 개선했습니다. 덕분에 방파제와 호안 공사에 쓰는 테트라포드(Tetrapod, 파도 에너지를 흡수하는 콘크리트 블록) 생산량이 하루 200개에서 350개로 껑충 뛰어올랐죠. 쿠웨이트 슈아이바 항만 공사를 할 때에도 경사식 방파제(Mound Breakwater) 안벽에 블록 쌓는 일을 사람이 직접 물속에 들어가지 않고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괜찮아, 모르는 건 배우면서 하면 돼 현대건설 신입사원 하계수련회에서

"사회에 첫발을 디디는 젊은이들은 가슴 속에 정열이 샘 솟듯 하고, 어떤 기후나 어떤 악조건도 다 소화하고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 해보지 않아 모르는 부분은 배우면서 하면 된다"


1970년대 오일쇼크로 경제가 곤두박질 칠 때 정주영 선대회장은 오일달러를 벌기 위해 중동으로 진출한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당시 중동시장은 미국과 유럽, 일본의 무대였던 데다 사막에서 공사를 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는 주변 만류도 많았습니다. 선대회장은 “아직 해보지 않아 모르는 부분은 배우면서 해나가면 되고, 없으면 만들면서 해결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바레인 아랍 수리 조선소를 시작으로 중동에 현대의 깃대를 꽂기 시작했죠. 훗날 선대회장은 신입사원들에게 “사회에 첫발을 디디는 젊은이들은 가슴 속에 정열이 샘 솟듯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아직 해보지 않아 모르는 부분은 배우면서 하면 된다”고 격려했습니다.

현장에서는 ‘호랑이’로 불렸지만, 일터 밖에서는 젊은 세대와 소통하기 위해 신입사원 수련대회에서 함께 씨름을 하거나 당시 유행곡을 외워부르는 등 소탈함을 지닌 선대회장이었습니다. 선대회장은 자신과 수많은 기능공, 임직원이 이룬 회사가 ‘현대’이며, 함께 만들었으니 근본적으로 같은 동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라고 여겼던 선대회장은 관리자가 권위의식을 갖는 것을 경계하며 ▲근로자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고운 말을 쓸 것 ▲명령보다는 동기부여로 의욕을 올려 자율적으로 작업이 진행되도록 할 것 ▲관리자의 인격적 결함이 작업장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자기 계발에 노력할 것 등의 내용이 담긴 ‘인력 관리 지침’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최고의 결과를 얻고 싶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서산 간척사업 현장에서

"나는 무슨 일이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평생을 언제나 최선의 노력을 쏟으며 살아왔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하는 최선. 이것이 내 인생을 엮어온 나의 기본이다"


정주영 선대회장의 인생에 ‘적당히’라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평생을 ‘마지막까지 다하는 최선’으로 살아온 선대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창조적 예지’ ‘적극 의지’ ‘강인한 추진력’이라는 현대건설의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죠. 불모지에서 희망의 싹을 피워내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정주영 선대회장. 당신의 삶으로 생생하게 증명해낸 혁신의 역사를 기억하며, 우리도 불가능을 뛰어넘는 도전을 멈추지 않기를 희망해봅니다.


아산의 주요연보 1910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출생 (1915.11.25) 1940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1946.04) 현대토건사설립 (1947.05.25) 1950 낙동강고령교복구공사착공(1953.04) 전후 최대 단일공사한강 인도교복구공사수주(1957.09) 1960 국내최초의 해외 건설공사진출 태국 파타니나라티왓고속도로 건설공사(1965.09) 경부고속도로 착공(1968.02) 1970 고리원전 1호기 착공(1970.10) 한국최초의 자동차모델 포LI[Pony) 생산 (1976.01) 대한민국 대역사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공사 수주(1976.06) 1980 88서울올림픽유치위원회 위원장 역임 (1981.05) 서산간척공사, 유조선 이용한 정주영 공법 (유조선 물막이] 성공(1984.02) 현대그룹 명예회장취임(1987.01) 1990 제14대 국회의원(전국구) 당선 (1992.03) 통일소 500마리와함께 방북(1998.06) 2000 작고(2001.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