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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칼럼] 벽화를 통해 본 과학 강국, 고구려

2021.06.25 2min 12sec

고구려 고분 벽화인 <수렵도>를 배경으로 말을 타고 자장면을 배달하며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라고 우렁차게 묻던 TV CF가 있었습니다. ‘배달’을 광고하며 대단한 인기를 끈 이 CF에는 만주를 호령하던 동북아시아의 강국 고구려의 기개가 묻어나 웃음의 묘미를 더했죠. 고구려인의 강인한 기상이 고스란히 담긴 고구려 벽화는 예술뿐 아니라 당시 문화와 과학기술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입니다.


고구려 무덤 벽화


고구려는 어떤 나라일까?
영화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조인성 분)은 당나라 대군 앞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는 물러서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며 군인과 성민들을 독려해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안시성 전투처럼 우리에게 각인돼 있는 고구려의 이미지는 북방의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강인함’입니다. 그래서 호랑이를 뒤쫓아 사냥하는 고구려인의 기상을 확인할 수 있는 <수렵도>가 CF에 등장할 만큼 유명하죠. 그런데 벽화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강인함뿐 아니라 주변 국가의 문화를 수용하고 과학기술을 활용할 줄 아는 포용적이고 실용적인 면모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무덤 벽화를 남긴 것은 고구려입니다. ‘고구려’ 하면 무덤 벽화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고구려 무덤의 특성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우선 무덤 벽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벽화를 그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고구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굴식 돌방무덤은 커다란 방과 복도가 있어 공간이 충분합니다. 특히 무덤을 죽은 자의 방이라고 여겼던 고구려인들은 생전의 생활 모습이나 종교적 그림을 벽화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굴식 돌방무덤은 형태상 입구가 노출되어 쉽게 도굴범의 표적이 되곤 했습니다. 이러한 무덤의 구조는 내부에 있던 부장품은 사라지고 벽화만 남은 이유가 되어 역사적으로 큰 안타까움을 줍니다.
고구려 벽화는 초기에 풍속화가 많고, 후기로 갈수록 종교적인 그림이 많아집니다. 황해도 안악3호분(357년)에는 부엌, 차고, 우물의 모습과 묘주를 호위하는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광대한 영토를 관리하는 데 바탕이 되는 토목, 야금, 기계 등 공학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대행렬도>를 보면 수레에 탄 묘주를 호위한 악대와 개마무사를 비롯한 250여 명의 사람이 행진하고 있는데, 그림의 구도와 행렬의 배치를 고려했을 때 전체 행렬 중 일부만 묘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체는 아마 500여 명에 달하는 거대 행렬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대규모 행렬이 뒤엉키지 않고 지나가려면 폭넓은 도로가 잘 정비돼 있어야 합니다.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고 주변국과 교류하기 위해서도 도로망 정비가 필수입니다. 벽화에 수레가 자주 등장하고 수레바퀴를 만드는 차륜신의 모습까지 등장할 정도로 고구려는 수레를 즐겨 사용했지만, 아쉽게도 이 뛰어난 육상 운송 시스템은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천년 뒤 조선은 오히려 규모나 기술 면에서 고구려보다 뒤처진 상태가 됩니다.


고구려 무덤 벽화 - 사냥하는 풍속화


세계 최고의 천문도를 가진 민족
실생활을 그린 벽화에서도 고구려가 과학기술을 잘 활용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벽화에는 퍼올리는 방식의 우물이 아니라 지렛대 원리를 활용한 용두레 우물이 묘사돼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공학 원리는 수·당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튼튼한 성과 ‘동양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군총 같은 거대한 돌무지무덤을 만드는 데도 사용됐습니다.
벽화는 후기로 가면서 종교적 색채가 짙어져 불교나 도교의 세계에 대한 묘사가 늘어납니다. 서역에서 불교와 함께 전해진 모줄임 양식(돌로 덮어 모서리를 줄여 나가다가 천장을 막는 방식)의 천장은 다양한 층의 공간을 확보해 벽화를 그려 넣을 수 있는데, 이 공간을 적절히 활용해 종교적 세계관을 표현했습니다. 특히 사자의 영원한 안식과 영혼의 안녕을 위해 그린 <사신도>와 같은 그림은 예술적 완성도가 매우 뛰어났습니다.
고구려 벽화는 천체를 정확하게 관측해 남긴 천문기록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별자리인 28수(宿)를 차용했지만 우리의 하늘에 맞춰 새롭게 관측·수정해 중국보다 훨씬 정확하게 표시했습니다. 중국이 장식적인 의미로 별자리를 벽면에 그렸다면 고구려는 오늘날의 적도좌표계와 같은 원리로 정확한 위치에 별자리를 그렸습니다. 천구의 적도와 천구의 북극을 기준으로 천체의 위치를 표시했던 거죠. 고구려의 뛰어난 천체 관측기술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고천문도인 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로 이어졌습니다.
벽화의 천체관측 자료는 고구려가 중국의 주장과 달리 독자적인 국가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중국의 천문도를 사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관측을 통해 고구려의 하늘을 표현할 수 있었다는 건 중국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고구려 고분 벽화는 1500년 이상의 만고풍상을 견뎠지만 발굴 이후 100여 년 만에 회벽의 탈락과 손상 등으로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어 많은 이의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고구려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 남다른 것은 단지 강대한 국가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꽃피운 화려한 문화에서 포용성과 주체성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글=최원석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