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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dai Origin,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정신 ‘아산 정주영’

2021.03.25 3min 54sec

정주영 선대회장님 스케치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음 한 발을 내딛는 용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창조성, 오늘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개척하는 추진력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현대건설의 DNA이자 경쟁력입니다. 정주영 선대회장이 우리 곁을 떠난 지 20년, 강산이 두 번 바뀌어도 그의 위대한 정신은 우리 곁에 오롯이 남아있습니다.


글·정리=박현희



게임 체인저 시대를 앞서간 혁신
정주영 선대회장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혁신의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특유의 추진력 덕분에 ‘불도저’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무턱대고 일을 진척시키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많은 일이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였을 뿐입니다.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선대회장

[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선대회장 ]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도 불가능이란 단어가 사람들 입에 올랐습니다. 국내 안팎으로 “한국이 고속도로를 짓는 것은 시기상조다” “토목의 ‘토’자도 모르는 자가 일을 저질렀다”고 반대했습니다. 20세기 최대 역사(役事)인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위해 울산에서 주베일까지 엄청난 자재 물량을 바지선에 실어 나르는 해양 수송 작전을 펼칠 때도 “당치 않다”는 만류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선대회장은 “할 수 있다”는 굳센 신념과 의지로 모두의 걱정을 기우로 만들었습니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상식의 틀에서 벗어나 얻은 결과였습니다.
현대건설이 국내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것도 기존 프레임을 깨는 선대회장만의 도전정신이 바탕이었습니다. “모험이 없으면 큰 발전도 없다”고 말한 선대회장은 1965년 선진 16개국 29개 업체와 겨뤄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했습니다. 국내에 고속도로 하나 없던 시절 이뤄낸 쾌거로, 당시 태국으로 가는 기술진과 노무자들의 첫 출국 모습을 KBS가 생중계할 정도로 큰 이슈였습니다.


서산간척사업(1984년 2월)] 물막이 모습

[ 서산간척사업(1984년 2월) ]


선대회장은 20세기 대한민국의 변화를 주도한 게임 체인저(Game Changer,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는 사람)였습니다. 중동 건설 붐이 절정에 이른 1977년 무렵, 선대회장은 국토 확장의 꿈을 키우며 서산 간척사업을 계획했습니다. 이익과는 거리가 먼 공사였지만, 땅은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유산이었기에 많은 반대에도 뜻을 이어 나갔죠.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드는 과정 중 최고 난도는 자동차만 한 바위도 순간 쓸어버리는 초속 8m의 강한 유속을 마주할 때였습니다. 답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기필코 답을 찾아냈던 선대회장은 ‘정주영 공법’을 탄생시켰습니다. 폐유조선을 이용한 전무후무한 발상 덕에 방조제 공사에 필수인 물막이에 성공한 우리나라는 전체 국토의 1%에 해당하는 약 1만6000ha의 토지를 더 갖게 됐습니다.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이 무한한 인간의 잠재력은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목표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이에 상응한 노력만 쏟아 부으면 누구라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중에서



신용 약속을 금으로 여긴 건설인
선대회장은 성실과 신용을 좌우명이자 경영의 최우선 가치로 여겼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1953년 4월, 선대회장은 대구와 거창을 잇는 고령교를 복구하며 전화(戰禍) 속 현대건설의 깃발을 꽂았습니다. 물자 수송과 지리산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복구가 시급했던 고령교는 총 길이 195m로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장대교량이었는데요. 기초만 남은 채 거의 완파된 상태인 데다 계절별로 가늠할 수 없는 낙동강 수심,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자재비와 인건비 등이 치솟은 탓에 공사 중단의 위기도 많았습니다. 20년이나 갚아야 했을 정도로 큰 빚을 져야 하는 순간에도 공사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신용을 목숨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당시 정부를 크게 감동시켰고, 그 후로 현대건설에는 ‘믿을 수 있는 회사’라는 평판이 따라붙었습니다.


[‘현장의 호랑이’로 불렸던 정주영 선대회장. 성실과 신용을 경영의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어떤 순간에도 책임감 있게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 ‘현장의 호랑이’로 불렸던 정주영 선대회장. 성실과 신용을 경영의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어떤 순간에도 책임감 있게 공사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


선대회장은 ‘오늘과 같은 내일은 후퇴’라는 신념으로 남보다 앞서 태국 공사로 해외건설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엔 허투루 얻어지는 성과란 없는 법.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는 건의가 빗발칠 정도로 현장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일은 끝내야 하고, 태국에 양질의 고속도로를 공기 내에 마쳐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며 “우리 ‘현대’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중단은 있을 수 없다”고 일축했습니다. 그렇게 첫 해외건설 도전은 당시로선 적지 않은 2억8800만원 여의 적자를 안겼습니다. 그러나 태국 정부는 갖은 어려움을 딛고 끝내 공사를 완수해낸 현대건설을 신뢰하며 이후 다섯 번의 고속도로 공사를 더 맡겼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 모습

[경부고속도로 공사 모습]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는 공기를 맞추기 위해 일반 시멘트보다 3배 비싼 조강 시멘트를 사용했습니다. 어차피 수판을 엎어놓고 시작한 일이었기에 이익을 남길 수 없다면 공기라도 맞춰야 한다는 판단에서였죠. 늘 “이익이냐, 신용이냐 중에서 선택하라면 나는 언제나 신용이다”고 말해온 선대회장이었습니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라면 손해도 감수했던 선대회장은 스스로 “건설인”이라 소개했습니다. 각종 산업시설과 기반시설, 국가 간접시설을 건설하는 일은 선이 굵으면서도 정밀해야 했고, 선대회장에게 꼭 맞는 옷과 같았습니다.
“나는 성취감을 좋아한다. 그래서 ‘현대건설’ 외에도 많은 업종을 갖게 돼 그룹 회장, 명예회장으로 불리고 ‘경제인’으로 불린다. 하지만 혼자 내심으로 나는 어디까지나 건설업을 하는 ‘건설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잃어본 적이 없다.” -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중에서



소탈함 가슴 따뜻했던 현장의 호랑이

현장에서는 ‘호랑이’로 불렸지만 일터 밖에서는 일반 근로자와 막걸리를 마시고 젊은 세대와 소통하기 위해 신입사원 수련대회에서 함께 씨름을 하거나 당시 유행곡을 외워 부르는 등 소탈함도 지녔습니다. 선대회장은 자신과 수많은 기능공, 임직원이 이룬 회사가 ‘현대’이며, 함께 만들었으니 근본적으로 같은 동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라고 여겼던 선대회장은 관리자가 권위의식을 갖는 것을 경계하며 ▲근로자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고운 말을 쓸 것 ▲명령보다는 동기부여로 의욕을 올려 자율적으로 작업이 진행되도록 할 것 ▲관리자의 인격적 결함이 작업장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자기 계발에 노력할 것 등의 내용이 담긴 ‘인력 관리 지침’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평등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사회는 평등의식 위에 세워지는 법이다. 일을 하기 위해 상하 질서가 있는 것이지, 직장의 상하가 인격의 상하는 결코 아니다. 직책이 높다고 거드름을 피울 것도, 낮다고 위축될 것도 없다” -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중에서


[직원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소탈하게 웃고 있는 선대회장]

[직원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소탈하게 웃고 있는 선대회장]


선대회장은 국내외의 힘든 공사들을 최선을 다해 수행했던 현대건설 임직원과 근로자들이 늘 고마웠습니다. 땀과 정성으로 얻은 소중한 이익이기에 더욱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죠. 1977년 7월 1일 ‘아산사회복지재단’(이하 아산재단)이 세워진 배경입니다. 선대회장은 당시 가치로는 500억원 상당의 현대건설 주식 50%를 출연해 아산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이는 당시 정부의 1년 사회복지 예산을 크게 웃도는 금액이었죠. 선대회장은 아산재단을 미국의 록펠러 재단, 포드 재단에 버금가는 재단으로 성장시키는 것을 꿈꾸며 ‘의료사업’을 중심으로 ‘사회복지지원’ ‘연구개발’ ‘장학사업’ 등 4개 부분으로 사업영역을 나눴습니다. 돈이 없어 병을 고치지 못하고, 공부를 포기하고,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모두가 애쓰던 1970년대 말은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저 “기업의 바탕이 되는 사회와 국가가 건강해야 기업이 존재하는 의미가 있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으로 대규모 민간 사회복지 사업을 진행한 거죠.
“병고와 가난은 악순환을 일으킵니다. 병치레를 하다 보면 가난할 수밖에 없고, 가난하기에 온전히 치료받을 수 없게 됩니다. 현대는 건강하고 유능한 수많은 사람의 힘으로 오늘날까지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의 재산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일에 뜻깊게 쓰고 싶다는 것이 저의 오랜 소망이었습니다.” - 아산재단 설립발표 기자회견 중에서



뿌리 변하지 않는 현대건설의 힘
정주영 선대회장은 타고난 긍정주의자였습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서울에서 고된 막노동을 할 때도, 모두가 불가능 하다고 반대할 때도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했을 뿐 좌절감이나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타고난 건강과 근면함만 있으면 오늘보다 내일 더 발전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정적으로 경영활동을 펼쳤던 계동 본사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는 선대회장

[ 열정적으로 경영활동을 펼쳤던 계동 본사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는 선대회장 ]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 온 선대회장의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건설 임직원에게 온전히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현대건설은 근면과 신용을 주춧돌 삼아 대한민국 대표 건설사로서 세계의 랜드마크를 짓고 있습니다. 도전과 혁신이라는 반석 위에서는 글로벌 톱 건설사로서 ‘최초’와 ‘최고’의 기록을 세우고 있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마음은 고객을 생각하는 최상의 품질과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사회공헌활동으로 연결 중입니다.
2021년 3월 21일은 선대회장이 하늘의 큰 별이 된 지 2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한 사람의 기업인이자 성실한 노동자로 산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책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며 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정주영 선대회장의 걸어온 길은 예측할 수 없는 경제 상황과 팬데믹으로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위로이자, 변하지 않는 현대건설의 뿌리로 남아 있습니다.



현대건설 사우들이 말하는 ‘아산 정주영’


한지수

한지수 책임매니저(페루 친체로 신공항 부지조성 공사 현장)


“본사와 국내외 현장 등을 오갈 때마다 새로운 업무와 환경 변화에 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힘든 일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강력한 극복 의지와 끈기를 말씀하셨던 선대회장님을 떠올리곤 합니다. 저는 우리 회사의 첫 페루 현장에서 근무 중입니다. 선대회장님이 가슴 속에 심어주신 뜨거운 열정을 기억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미선

김미선 연구원(그린바이오스마트시티사업단)


“서산 특구 개발 업무를 하면서 서산에 대한 선대회장님의 애정과 더 나은 나라를 위한 의지를 다시금 기억하게 됩니다. 지금 서산은 디지털 기반의 농업 바이오 단지와 미래 모빌리티, 스마트시티, 친환경 에너지 등 현 시대에 의미 있는 곳으로 또 한 번 변모 중입니다. 선대회장님의 뜻을 이어받아 사명감을 갖고 일하겠습니다. 현대건설 파이팅!”



신현희

신현희 매니저(건축해외영업실)


“선대회장님의 모든 순간은 2021년을 살고 있는 청년들과 견줘도 지지 않을 만큼 도전정신과 열정으로 반짝였다고 생각합니다. 계동 본사에서 진행된 전시회를 통해 다시금 선대회장님의 열의를 느낄 수 있었는데요. 카리스마가 담긴 모습부터 가족, 근로자들과 함께한 사진을 보면서 인간적인 모습 또한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뵌 적은 없지만 그립고 존경합니다.”